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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저지른 박해들 (1)
운영자 2014-10-04 추천 0 댓글 0 조회 103
복음의 원리와 정신은 안중에도 두지 않던 로마카톨릭은 손수 칼을 들고서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며 그것을 수세기 동안 황폐화시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암흑시대”(dark ages)라 부른다. 교황에 의해 휘몰아치던 박해의 폭풍은 프랑스의 왈덴스(Waldenses)에게 처음으로 불어닥쳤다.


프랑스의 왈덴스에 대한 박해

로마카톨릭이 교회 안으로 잡동사니 같은 혁신안들을 가지고 들어온 것을 간파한 몇몇 성도들은 참된 순수성을 간직한 복음의 빛을 비추기로 결심했다. 그 중심에 브랑가리우(Berengarius)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A.D. 1000년을 전후로 그의 순수한 복음의 진리 설교에 확신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리에 동의를 표했고, 그들은 브랑가리안스(Berengarians)라 불렸다.

브랑가리우를 이어 쁘떼 브루이(Peter Bruis)가 일데뽕슈(Hildephonsus) 백작의 보호 아래 뚤루스(Toulouse)에서 말씀을 전파했다.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브루이는 개혁자들의 모든 교리를 한 권의 책에 담아 <적그리스도, Antichrist>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A.D. 1140년 즈음 신앙을 쇄신한 이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놀란 교황은 늦게나마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영주들에게 영토에서 개혁자들을 추방해 달라는 서한을 띄우는가 하면, 많은 학자들을 고용해 그들의 교리를 반박하는 글을 쓰게 했다. A.D. 1147년, 개혁자들은 그들의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던 뚤루스의 앙리(Henry)로 인해 ‘에네리샹’(Henericians, 앙리파)이라 불렸고, 신앙에 관한 그 어떤 논증도 성경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해서 카톨릭교도들에 의해 ‘아뽀스똘릭스’(apostolics, 사도들)라 불렸다. 그러다 결국 리용(Lyons) 태생의 경건과 학식으로 이름 높은 피터 왈도(또는 발도)(Peter Waldo or Valdo)가 로마카톨릭 제도에 대한 극렬한 반대자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개혁자들은 왈덴스(Waldenses) 또는 왈도이즈(Waldoys)라 불리게 되었다. 리용의 주교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왈도와 그 추종자들을 파문시켰고, 그 주교에게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왈도와 개혁자들에게 걸려 있던 소송 사건은 심문관(inquisitors)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시켰다. 심문관은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가 개혁자들을 찾아내어 세상 권세에 넘겨줄 수 있는 심문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특정 수도승들이었다. 소송 절차는 간단했다. 고소 하나면 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충분했으며, 피고는 공정한 재판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잔인한 계책이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지 못하자, 몇몇 학식 있는 수도승들을 왈덴스들에게로 보내 그들 가운데서 설교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려 보도록 했다. 이 수도승들 중에는 도미니크 수사단(修士團)이라는 기사단을 조직한 도미니크(Dominic)가 있었다. 수사단원들은 그 후 여러 종교재판에서 우두머리급 심문관들이 되었다.

심문관들이 지닌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들은 나이나 성별,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에게나 소송을 걸었다. 아무리 파렴치한 고소라도 합법적으로 여겨졌고, 익명의 편지로 흘러든 정보까지도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재산이 많다는 것은 이단과 맞먹는 범죄여서 부유한 사람들은 이단이나 이단 옹호자로 숱하게 고소당했다. 또한 가장 절친한 친구나 가족일지라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신앙 때문에 갇혀 있는 이들을 아무도 보살필 수 없었다. 감금된 이들에게 작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전해 주거나 물 한 컵이라도 가져다 주는 날에는 이단들과 한패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변호사라도 자신의 친형제를 위해 변호할 수 없었다.

그들의 악의가 미치는 곳은 무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의 뼈를 무덤에서 파내어 불태움으로써 누구든지 까딱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 줬다. 임종을 눈앞에 둔 사람이 왈도의 추종자로 고소당하면 재산이 몰수당했고, 유산을 상속받은 자가 있을 시에는 그것을 속여 빼앗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성지(Holy Land)로 보내졌고, 그들이 없는 사이 도미니크 수사들이 집과 재산을 갈취했는데, 소유주들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도무지 모르는 일이라며 딴청을 피웠다. 이런 박해들은 로마카톨릭의 여러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수세기 동안 자행되었다.


알비겐스(Albigenses)에 대한 박해

알비겐스는 알비(Albi)라는 지방에 거주하던 개혁신앙인들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라떼랑(Lateran) 공회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늘어만 갔다. 뚤루스 백작(earl of Toulouse) 레이몽(Raymond)과, 동명이인 푸아 백작(earl of Foix) 그리고 브지에르 백작(earl of Beziers)과 같은 저명한 귀족들도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쁘떼(Peter)라는 이름의 탁발 수도사가 뚤루스 백작 영내에서 살해되자 교황은 이것을 그 귀족과 그의 영주민들을 박해할 구실로 삼았다. 알비겐스를 진압할 군대를 일으키려고 유럽 전역에 특사를 파견했고, 성전(Holy War)이라 이름 붙인 이 전쟁에 참여하여 40일간 복무하는 모든 이들에게 천국을 약속했으며,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이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나 뚤루스 백작은 교황 특사들과 카톨릭 귀족 몽포르 백작(earl of Montfort)에 맞서 뚤루스와 다른 지역들을 방어하여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여간해서는 뚤루스 백작을 공개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게 되자, 이번엔 프랑스 국왕과 대비와 세 대주교가 또 다른 가공할 병력을 일으켰다. 그들은 뚤루스 백작에게 협상할 게 있으니 나와 줄 수 없겠냐는 간책을 썼고, 그들을 철석같이 믿고 나타난 그를 붙잡았다. 그는 적들이 보는 앞에서 맨발과 맨머리로 강제로 세워진 채 신앙을 버리겠다는 비굴한 서명을 강요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알비겐스들에게 가혹한 박해가 가해졌고, 평신도가 신성한 성경을 읽는 일을 금지시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알비겐스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하기는 162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648년에는 리투아니아(Lithuania)와 폴란드(Poland) 전역에 걸쳐 맹렬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코작인들[Cossacks, 러시아 남부의 변경 지방에 사는 혼혈의 농경 종족으로 말을 잘 타며 제정 시대에는 경(輕)기병으로 유명했다.]이 어찌나 극악무도하게 잔인하던지 타타르인들[Tartars, 중세에 아시아 서부와 유럽 동부를 침략한 몽고족이나 터키족의 유목 민족] 스스로도 그들의 야만스러움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아드리앙 샬랭스키(Adrian Chalinski)라는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느긋한 불에 산 채로 구워졌다.

1524년, 프랑스 작은 도시 멜당(Melden)의 존 끌라르(John Clark)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써 놓은 전단을 교회 문에 붙여 놓은 일로 채찍질당한 후 이마에 낙인이 찍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후에도 로렌(Lorraine)의 망뜨(Mentz)로 가서 몇몇 형상들을 파괴시켰는데, 이 때문에 오른손과 코가 잘리고 양팔과 가슴이 펜치로 쥐어뜯겼다. 그는 이런 잔악한 행위들을 꿋꿋하게 견뎌내었고, 우상 숭배를 금하는 시편 115편을 노래할 정도로 침착하기까지 했다. 그 후 그는 불 속에 던져져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말다(Malda) 태생의 어떤 사람은 미사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명백히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서서히 타오르는 불에 태워졌다. 리모생(Limosin)에서는 개혁 종파 목사 존 드 까듀르꼬(John de Cadurco)가 화형에 처해졌다. 펠레이 추기경(cardinal of Pellay)의 서기관 프랑시스 브리바르(Francis Bribard)는 개혁자들을 편들어 말했다는 이유로 혀가 잘리고 A.D. 1545년 불태워졌다. 쟈메 꼬바르(James Cobard), 즉 성 미샤엘(St. Michael) 시의 학교장은 ‘미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여 A.D. 1545년 화형에 처해졌다. 같은 시기 말다에서는 14명의 남자들이 불태워졌고, 아내들은 남편들의 처형을 옆에서 뜬 눈으로 지켜보도록 강요당했다.

A.D. 1546년, 쁘떼 샤뽀(Peter Chapot)는 프랑스어 성경을 프랑스로 들여와 팔고 다니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모(Meaux)에 사는 어느 지체 부자유자와 스떼팡 뽈리오(Stephen Poliot)라 불리는 페라(Fera)의 학교장 존 앙리쉬(John English)가 믿음 때문에 화형에 처해졌다. 보석상 블롱델(Blondel)은 A.D. 1548년 리용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보내졌고, A.D. 1549년 법정 선고에 따라 믿음 때문에 화형에 처해졌다. 열아홉 살 청년 헤르베르(Herbert)는 디종(Dijon)에서 불길에 넘겨졌고, 플로랑 베노뜨(Florent Venote)도 같은 해에 화형당했다.

A.D. 1554년, 개혁 신앙의 두 남자가 그 중 한 명의 아들, 딸과 함께 체포되어 니베른(Niverne) 성에 감금되었다가 조사를 받을 때 신앙을 숨김없이 고백하자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들은 몸에 기름과 유황, 화약이 발라질 때 다음과 같이 외쳤다. “차라리 소금을 발라 달라. 이 죄악으로 가득하고 썩어빠진 육신에 소금을 바르란 말이다!” 그러자 그들의 혀가 잘렸고, 그들은 타오르는 불길에 넘겨졌다. 불길은 그들의 몸에 발라진 인화성 물질 때문에 그들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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