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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
D.L. 무디 2012-02-14 추천 0 댓글 0 조회 765
나는 세상에서 '복음'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오해되고 있는 말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날마다 듣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말의 분명한 뜻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좋은소식'이란 뜻입니다. 복음은 곧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 이상으로 더 좋은 소식이 하늘에서 계시된 적이 없습니다. 복음 이상으로 더 좋은 소식이 인류의 귓전을 두드려 준 적이 없습니다. 천사들이 이 소식을 전하러 지상으로 내려올 때 베들레헴 벌판 양 치는 목자들 에게 무엇이라고 전했습니까? '보라, 내가 큰 슬픔의 소식을 알림이니'고 말했나요? 아닙니다. '보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알림이니 이것은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라.'(눅2:10)고 했습니다.

그 때의 목자들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태도와 같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을 좋은 소식으로 믿을 수 없다. 이 천사들까지 부흥회 나팔을 부는구나, 야, 이 천사들이 우리를 흥분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 소리는 오늘날 사탄의 소립니다. 즉 '복음이 무슨 좋은 소식이냐? 사람을 우울하게만 만들 뿐이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복음을 믿는 순간 그 생활에 일대 혁명이 일어남을 사단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단의 세력아래에 있는 이마다 복음이 좋은 소식임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그대로 믿었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사람이 속달우편을 받으면 배달부의 표정을 보고 그 편지의 내용을 짐작합니다. 그것이 좋은 소식이라면 단번에 그의 얼굴에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눅15장의 얘기처럼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던 아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그런 사연이라면 그 얼굴이 얼마나 환해 지겠습니까? 아내가 만일 옆에 있다면 굳이 집에까지 가서 그 편지를 보여 주겠다고 미루겠습니까? 또는 아내가 좀 보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얼른 그 편지를 아내에게 줄 것이며 아내는 그것을 읽고 또한 얼굴이 환해질 것이 아닙니까?

복음은 이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소식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몸들 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몸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사이를 화해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라는 이 복음을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어둠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복음을 믿으면 갈보리 로부터 오는 빛은 그의 길을 비추고 그는 항구(恒久)한 세월을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밝은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왜 복음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복음이야말로 내가 일찌기 들어본 것 가운데서 가장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날까지 즐겨 복음을 전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은 내게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을 해주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복음이 자기안에 심어준 만가지 선(善)은 다 얘기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나 나는 복음이 내속에서 뿌리채 뽑아준 세가지를 말할 수 있습 니다. 즉 복음은 나의 일생에서 내가 일찌기 만난 가장 무섭고 지긋지긋 하던 원수 셋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흉악한 원수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곧 마지막째 원수, 사망입니다. 복음은 내게서 이 사망을 없앴습니다. 지금부터 약 20여년전 내가 믿지 않았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그 때 얼마나 장래일이 암담하게 보이던지요. 내게 죽음이란 것은 언제나 몸서리쳐지는 한 괴물이었습니다. 죽음이내게로 와서 손짓하여 불러갈 그 날을 생각하면 언제나 소름이 끼쳐질 뿐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의 나이대로 교회 종을 울리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70, 80, 어떤 때는 단지 16, 어떤 때는 곧장 내 나이수대로 쳤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 꼿꼿해지고 말았습니다.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미지(未知)의 영원 세계로 낚아채여 끌려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지금은 무덤이란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하늘 나라로 가는 내 발걸음은,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고전15:55)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갈보리에서 굴러내려 오는 대답을 나는 듣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품에 묻혀 버렸노라.' 그리스도는 날 위하여 바로 그 사망의 독니를 빼어서는 그 독기를 자신의 몸에 받아 내셨습 니다. 꿀벌 한 마리를 잡아다가 그 독침을 빼내어 보세요. 파리 한 마리와 같이 아무 겁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망은 그 쏘는 것을 내게서 영원히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죽음이라는 것은 다만 예수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 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외에는 내게 아무 의의도 없음을 생각할 때 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길래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1:21)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요셉의 무덤안에 둘 때 사망은 그 무덤 위에 올라 앉아 이렇게 뽐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수는 내 것이다. 내 밥이 되고 말았어. 그는 살아 생전에 자기가 부활이며 생명이라 했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차디찬 내 품에 그를 거두어 들였단 말이야. 그도 별 수 없이 내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판이군, 하하.'

천만에 올시다! 영광의 새 아침이 되자 인자는 죽음의 억센 사슬을 와직끈 끊어 헤치시고 일어 나셨으니 곧 사망을 넘어뜨린 정복자로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살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주님은 외치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살것입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사는 것을 그렇게 즐겁게 또 죽는 것도 그렇게 즐겁게 만드는 복음이 결코 나쁜 소식일 리가 없습니다.

나를 괴롭힌 다른 무서운 원수는 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은 죄, 갖가지 숨 은 생각, 갖가지 악한 욕망, 어둠 가운데서 행한 갖가지 행동의 모든 죄가 빛으로 드러나서 우주 삼라만상 앞에 폭로될 그 날을 생각할 때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생각이 아주 가시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씻겨졌다고 복음은 내게 선포해 줍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죄를 끄집어 내어 그의 등뒤로 멀리 던져버리셨습니다. 내 죄를 처치하는 데는 그 곳이 제일 안전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앞으로만 향하시고 뒤로 물러가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놓임을 받는다는 이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죄인된 당신의 몸 그대로 그리스도께 나아오십시오. 그의 복음을 믿으면 당신의 죄는 안개 같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초대라기보다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원 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얼마든지 담대하게 그리스도께 나아와 맞바꿀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의 모든 죄를 벗어 버리고 그 대신 그리스도와 그의 의(義)를 옷 입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의 세번째 원수는 심판이었습니다. 나는 장차 하나님앞에 소환되어 갈 무서 운 그 날을 생각하고는 떨었습니다. 그 날에 그리스도께로부터, '너희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마25:41)하는 저주를 받을지, 또는 '준비한 그 왕국을 이어받으라.'(마25:34)하는 자비를 입을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일이 이미 해결 되었음을 내게 들려 줍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요5:24). 그러므로 이제 나는 죄의 심판과는 아무 상관 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이 결정하셨으니까요. 그리스도 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또 무엇 때문에 복음이 좋은 소식입니까?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누구든 지 이 복음을 받기만 하면 당장 영생을 얻게 되는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에 하늘의 천사가 천상에서 내려와 우리 인간에게 꼭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선포 했다고 합시다. 그 때 당신의 유일한 소원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온 우주 공간을 진동시킬 유일한 부르짖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해주오!' 오직 이것 뿐일 것입니다. 생명이야말로 사람이 최상으로 요구하고 최상으로 아끼는 것입니다.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배안에 백만장자가 있다 합시다. 그는 단 육개월만이라도 더 살게 해 준다면 자기 전 재산의 반이라도 아낌 없이 주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 육 개월만의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입니 다. 이토록 엄청나도록 귀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라고 울며 기도하며 매달리기 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가장 기이하고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복음 전도나 설교를 들을 때 시무룩한 얼굴로 마치 장례식이나 사형장에 가는 것같은 모습을 하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마침 기회가 있어서 나는 리취몬드에 가서 그란트 장군의 영내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흑인들이 노예해방을 자축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금방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 이었습니다. 노예의 사슬은 풀리고 바야흐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눈 뜨는 순간 이었습니다. 나는 과거 숱한 능변가들의 열변을 들어 보았습니다마는 그 때 그 흑인교회에서 외치던 북부 출신의 흑인 목사보다 더 유창한 웅변은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어머니들이여! 오늘은 당신들의 날입니다. 당신네들의 품속에서 잡아채여 머나먼 낯선 곳으로 팔려간 그 귀여운 아기들도 오늘로서 마지막입니다. 당신네들은 영원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는 또 외쳤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오늘은 여러분의 날입니다. 여러분의 가련한 몸들을 사정없이 후려치던 눈물도 피도 없던 주인의 회초리도 오늘로서 마지막, 마지막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는 또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젊은 처녀들이여! 오늘은 여러분의 날입니다. 여러분을 상품으로 갖다 놓고 제멋대로 호가(呼價)하던 경매대도 오늘로서 마지막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해방된 것입니다!"

나는 일찍 그런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할것없이 손바닥을 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 쳤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좋은 소식인 줄 진정으로 믿은 것 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는 사람처럼 비루하고 악하고 무자비한 주인을 섬기는 노예는 없습니다. 그토록 거역하고 고집 부리고 얽매인 불쌍한 죄인에게 복음은 용서의 소식을 전합니다. '지금 너는 그분과 친하고 맘을 편히 하라.'(욥22:21) - 복음은 하나님과 친구가 되게 하는 소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를 떠나셔서 비천한 마굿간으로 내려오신 것은 지극히 천하고 악한 죄인을 붙들어 주님의 품안에 안겨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화목의 복음이 어찌 기쁨의 복음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은 또한 값없이 주는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받을 수 있습 니 다. '이 기쁜 소식은 누구에게 주는 소식입니까?'하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시려거든, 우리 함께 그 때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마지막 작별하시던 광경을 상상해 봅시다. 소름 끼치던 갈보리의 모든 북새도 이제는 사라졌고 겟세마네와 빌라도의 법정도 이제는 지나갔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그는 무덤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 아버지의 오른 편에 좌정하실 채비가 되었 습니다. 이별의 시간이 박두하자 당신의 소수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셨을까요? 자기를 기다리는 보좌, 또는 자기를 영접하려 하늘 아버지의 반기시는 미소, 또는 과거의 추억들을 생각 하셨을까요? 또는 자기를 지금까지 따르던 제자들 을 못잊어하는 그런 생각들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당신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원수들, 자기를 멀리한 사람들, 자기를 멸시한 사람들, 자기를 죽이던 사람들을 생각하셨습니다. 또한 장차 자기를 미워하게 될 사람들, 복음에 대해서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결코 자기네 들을 위하여 죽지 않았고 그것이 사실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라고 뻗댈,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둘러 보시는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복받쳤습니다. 그리 하여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는 작별 분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와 같이 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모든 피조물이라 하셨는데 그것이 참말입니까?" "베드로여, 그러하다" "그러면 주님을 죽인 예루살렘의 죄인, 그 자들까지 말입니까? " "베드로여, 그러하다."

먼저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가서 내 얼굴에 침 뱉던 그 사람을 찾아내어 내가 그를 용서한다고 전하라. 가서 내 이마에 그 잔인한 가시관을 씌우던 사람을 찾아내어, 그가 만일 나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내가 나의 왕국에서 그를 위하여 한 면류관을 준비하겠노라고 전하고 그 관은 가시관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하라. 가서 내 손에 있던 갈대를 빼앗아 내 머리를 쳐서 내 이마에 가시 흠집을 더욱 깊이 내게 한 그 사람을 찾아내어, 선물로 주는 나의 구원을 그가 받기만 하면 내가 그에게 홀(笏)을 주어 지상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 고 하더라고 전하라. 가서 손바닥으로 나를 치던 그 사람을 찾아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이 하며 내가 그를 위하여 값 없이 이 피를 흘렸 노라고 전하라. 가서 내 옆구리에 창 끝을 들이밀어 찌른 그 가련한 군인을 찾아내어 내 중심으로 통하는, 그 창검보다 더 가까운 길이 있다고 일러주라. 내가 그를 십자가의 군병으로 만들 것이며 그 위에 펄럭이는 대장기는 사랑이라고 전하라."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됨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복음을 받음에 아무 층하가 없고 차별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무리 패역하고 극악무도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주립 형무소 간부 한 사람이 형무소 조회 시간에 1,100명이나 되는 죄수들 앞에서 "이번에 모범수로 특사를 받을 다섯 사람의 명단이 지금 내 손에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얼굴이 몹시 창백해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숨막힐 듯한 분위기는 장내를 뒤덮었습니다.

"르우벤 존슨, 앞을 나오시오."

간수는 사면장을 손에 들고 호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기척을 않습니다. 간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습니다.  "르우벤 존슨은 이리 나와 사면장을 받으시오. 이 사면장에는 주지사의 싸인이 있고 그의 직함이 찍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부터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누구하나 일어서지를 않습니다. 형목(刑牧)은 르우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는 19년 간이나 감방 살이를 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초리는 지금 그가 날을 듯 벌떡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 자신은 이 복도 많은 친구가 대체 뉠까? 하며 옆만 두리번거리고 앉았습니다. 세번째나 형목은 르우벤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우벤, 나가서 받아요." 그제서야 이 늙은이에게 모든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앞으로 나가 사면장을 받아들고 한 번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제 자리로 돌아와 그냥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소리내어 웁니다.

죄수들이 각자의 감방으로 들어가려고 열을 지어 섰을 때 르우벤도 열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형목은 다시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우벤, 열 밖으로 나오시오. 이젠 다시 죄수가 아니오." 르우벤은 열을 벗어 났습니다. 이미 그는 자유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선한 행실과 선한 성품이 있음으로써 이 용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아무리 선한 행실과 선한 성품 이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죄인이든지 이 사실을 믿는 이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또 무엇과 같은지 그런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찌기 거리를 방황한 건달 중 에서도 가장 큰 난봉장이라도 좋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자 중에서 가장 큰 악한 이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죄인에게 들려 줄 기쁜 소식을 가져 왔습니다.

'누구든지'라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오라....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계22:17) 나는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이세상의 어떤 남자든지 어떤 여자든지 어떤 어린아이든지 다 포함하는 말씀인 줄 압니다. 지금 한창 자라는 소년, 소녀도 좋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좋고 수줍 음 잘 타는 아가씨도 좋고, 어머니의 속을 썩히는 젊은이도 좋고 빈곤과 죄에 빠져 허덕이는 주정뱅이도 좋습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이 기쁜소식을 믿지 않으시렵니까? 이 기쁜 소식의 대상자가 바로 당신임을 믿지 않으시렵니까?

D.L . 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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